귀한 제자 9,000명의 영사가 되어 돌아오다!!
제자는 샌프란시스코의 몽골 영사관의 총영사가 되어 미국에 돌아온다!
Original Article: http://pnhwang.com/xe/56039
어제 몽골에 있는 제자가 전화가 왔다.
기도실에서 기도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두 주 전부터 몇 번 전화가 왔는데 받지를 못했다. 그런데 어제는 통화를 하게 되었다. 대화의 주제는 2년 전에 몽골에서 선교사와 만나 미리 언급한대로 Sanfransisco의 몽골 영사관의 총영사가 되어 미국에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선교사가 파악한 몽골인들은 샌프란시스코에 1,000명, Golden Gate(금문교) 다리 건너 Orkland에 2,500명, 그리고 Sacrament 지역에 400명 그리고 주변에 더 있어 4,000명 이상이 거주하며 미국내 시카고, 버지니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몽골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다. 그리고 동북부인 씨에틀(2,000명)과 중남부LA 지역 (2,000-3,000명), Denver (1,000명)에서 대사관의 증명서 발급, 대통령 국회 의원 선거 위해 모두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가야 한다.
1992년 몽골에서 우우르딩 게게 교회를 개척한 이후 선교사 본인과 함께 Full Time으로 일한 청년들이 15명 정도된다. 처음에는 12명을 뽑았다가 나중에는여러 교회들과 사역이 늘어나 인원 수를 늘렸다. 그 중에 한 명이 바이카(Baika) 청년이었다. 당시 만 17살이었다.
그는 단기 선교팀을 만나 예수교에 입문했다.
미국 와싱톤의 지구촌교회(이동원 목사)의 영어부 학생들과 타 지역 한인 이민자 자녀들로 구성된 영어 교사 단기팀이 20~39씩 떼를 지어 1992-1995년에 몽골에 왔다. 그 청년은 여름 방학 기간에 한국인 디아스포라 대학생들로부터 영어(English)를 배우기 위해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50번 중학교에 갔다가 영어를 배운 후 교사들로부터 예수를 대충듣고 선교사가 사역했던 믕힝 게렐 교회에 따라 왔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Battuya (현 몽골 국회의원 비서실장, 박사), Otgo(독일 거주), Dagiimaa( 2015년 당시 영국 대사관 근무), Oyuna, Solongo (미국 거주)등이 있다. 그 청년은 우리 교회를 나왔는데,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채 선교사의 다른 제자들에 의해 추천되어 교회의 사역자가 되었다.
그는 젊은 몽골의 기독교 인재였다.
그는 젊고 총명하여 선교사와 함께 마태복음서를 몽골어로 번역하는 핵심 멤버였고다. 또한 몽골어와 영어에 재능이 있어, 이후 선교사가 개척하여 750명이 출석하던 우우르딩 게게 교회의 주일예배 사회자가 되었고, 우리 교회가 발간하는 기독교 첫 신문들 가운데 하나인 "아가페"의 주필이 되었다. 선교사와 함께 마태복음을 몽골어로 번역해서 쪽 복음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다.
그가 그렇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질서 있고 품위있는 단정한 가정 교육 배경이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 외무부 고급 공무원이면서 라마 불교 대학교인 동양대학교의 철학 교수였다. 어머니는 선교사가 훗날 선 미국 콜로라도 덴버시에서 몽골인 교회를 개척할 때 큰 딸과 함께 전도를 받아 교회를 출석했었는데 인품이 좋고 책을 좋하하는 인자하며 키가 크고 말수가 적으며 온화한 선한 여성이었다. 미국과 몽골에 있는 두 딸들도 모두 책을 좋하했다. 한 마디로 몽골의 엘리트 가정 출신이었고, 질서있고 품위있는 부모 밑에서 가정 교육을 받은 청년인 셈이다.
그는 선교사와 함께 4~5년 정도를 성경을 배우며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1992년에 선교사가 동역했던 몽골 믕힝게렐 교회에 8월부터 출석했고, 11월에 우우르딩 게게 교회를 분립하여 설립할 때 새 교회 개척팀에 합류하여 선교사를 따라 나와 성경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선교사는 드넓은 몽골 전역에 전도여행을 많이 파송했었다. 그 역시 몽골의 최 남단 으믄고비 지역(600Km), 최고 먼 서부지역 오브스 도(1,500KM), 그리고 제일 먼 동부지역인 도르노드도 초이발산 도청소재지(700KM)에 전도자로 파송되어 교회 개척에 일조했다. 그의 나이가 17세 였는데 이후 21세까지 선교사의 제자이자 동역자로 일한 청년이였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신실함, 성실함"(Sincerity)의 대명사였다. 몽골에서 만났던 수 만명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신실하고 성실한 친구 가운데 한 명이 그였다.
그는 유럽 선교가들 연합체 인 JCS(Joint Venture Society)에 근무했다.
JCS는 몽골 내지 선교를 위해 유럽 선교사들로 구성된 몽골 개신교 선교 최고의 외국인 선교기관(NGO)이었다. 그는 우우르딩 게게 교회 사역을 마친 후 몽골 최대의 기독교 기관인 JCS에서 몇 년간 일하면서 행정을 배웠다. 그곳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온 60세가 넘은 베테랑 선교사인 David Andronoff, Bill Phiernov 등등 40여명의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사역하였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BA)을 졸업했고, 덴버에서 덴버 신학교 석사과정(MA)을 공부했다.
20대 중반에 미국으로 출발하여 재정이 어려운 가운데 어떻게 버텨내며 대학을 마쳤다. 그런후 2001년 선교사가 샌프란시스코 정좌희 형제님 집에 머물 때에 오하이오 주에서 버스를 타고 찾아와 만나 울며 선교사와 맺힌 담을 허물었다. 그런후 몽골에 갔을 때 다시 만났다. 선교사는 그의 근황을 묻은 후 선교사 안식년에 미국을 가서 LA에 몽골교회를 개척하는데 합류해서 동역자로 함께 개척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것을 받아 들여 2002년 첫 안식년 중에 미국 LA 몽골교회 개척 당시 Denver 가나안 교회의 김명수 목사님의 요청으로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는 미주에 개척된 몽골교회 역사의 두번째 개척교회의 역사가 되였다.
그는 미국 덴버에 있는 몽골 교회의 동역자겸 담임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의 곁에서 항상 함께 했고, 그의 신실함과 성실한 삶은 당시 Denver 1,500명 몽골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 결과 덴버 몽골인 교민회의 고문(Adviser)이 되었다.. 선교사가 교회를 시작한지 11개월 후에 성공적인 교회 개척을 마치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Washington DC로 선교사 가족이 떠날 때, 그는 덴버 몽골 교회를 이양 받았다. 그리고 덴버 Amaizing Grace 교회의 담인 목회자겸 전도사(Ahlagch)로 임명을 받았다. 그이 신실성은 덴버의 모든 몽골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의 믿을만한 교회와 몽골인 Community에 끼친 헌신과 공헌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는 쉽게 다음 사역지인 Washington Mongolian에 몽골인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죽도록 충성한 후 쫓겨난 고난과 핍박을 아는 자였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에게 햇빛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차가운 몽골의 겨울날씨처럼 싸늘한 냉기과 우박이 두들기는 날이 있다. 그는 그런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 참고로 선교사가 덴버에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11개월동안 사역한 결과 하나님은 평균 출석 40-55명 정도(어른 청년 30-45명, 어린 아이들이 10여명)를 보내 주셨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교회를 이양받아 몽골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되었다. 1년 후에 선교사가 다시 덴벌을 방문해보니 주일날 어린이들 외에 어른 청년들만 70여명이 출석했다. 선교사는 너무나 기뻤했다. 현지인에게 교회를 이양한 이후의 교회 성장과 현지인 토착화를 목격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 방문 이후에 어두운 그림자가 교회에 드리워지는 몇 가지 사건이 터졌다. 이는 한인 이민교회에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젊은이들만 가득한 교회에 남녀간의 이성 문제였다. 또한 초기 이민자들에 대한 신분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가 종교 비자를 만들어 주었다. 사실 교회에서 밤낮으로 일했던 세 명의 찬양 사역자, 교회 사역자들에게 종교비자 발급 받도록 교회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사실상 교회내의 풀 타임 사역자들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교회가 재정 능력이 없어서 교회에서 봉급을 못 주고 세상에서 일을하며 생활비를 자급하였다. 이런 것이 3건이나 되었다. 또한 교회 체크나 카드로 재정 지출과 수입 장부를 기록해야 하는데, 구정에 어긋나게 교회 물품이나 식료품을 개인 카드나 현금을 쓰고 교회 헌금에서 지출하였다. 당시 LA 지역의 한인교회들의 문제가 초기 몽골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미국 정부는 지나친 교회 종교비자 이용을 강력히 제자하던 바로 끄 때에 몽골 교회가 걸려 제제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법치로 살아보지 못하고 대충 살아온 유목민들에게 법의 잣대가 들이대자 문제가 크게 터졌다.
이 문제로 인해 수 만 달라를 받고 교회 지도자가 비자 장사를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그는 정부의 불법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실상은 초기 몽골인 이민자들을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하던 그 였다. 밤에는 남몰래 회사들과 개인 사무실에 가서 화장실 청소를 하며, 낮에는 신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던 성실한 주경 야독자였다. 젊은 여성이 혼전 임신해서 유산 문제가 나왔을 때 나와 교회가 키워 줄테니 절대 아이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찾아가 사정하며 권면하는 그였다. 이민자들의 몽골인들의 온갖 문제상담, 신분증 취득, 일용품 없는 자들의 구제, 일없는 자들에 대한 직장 알선, 영어 모르는 자들에 대한 통역 봉사, 차 없는 자들에 대한 운전 봉사, 아파트 찾아주고, 보험없는 자들을 위해 수없는 도움을 주었다.
그는 2002-2006년대 초기 몽골인 이민자들의 애환을 함께했다. 그러는 그의 교회와 사회에 대한 봉사와 수없는 지침의 결과는 미국 정부나 몽골 정부 혹은 교회에서의 상이나 면류관이 아니었다. 면류관 대신 미국 국토 안보부로부터 추방이라는 쓴 잔이었다. 특히 학비의 절반은 한인교회들의 장학금과 절반은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공부했던 대학원 과정에서 3학점이 부족한채 졸업도 못하고 짐을 싸서 몇 시간내에 쫒겨나야 하는 누명을 쓴 그의 모습은 인간의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는 몽골에서 쉼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았다.
아무 대책도 없이, 아무런 영광도 없이, 아무런 비젼도 없이 다시 육신의 고향인 몽골로 돌아왔다. 주머니에 단 돈 1,000불도 없이 돌아온 조국의 영토, 친구, 가족들은 추방이란 불명예로 돌아온 그에게 아무말이 없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 돌아온 그의 처량한 모습은 남편과 두 아들을 모압 나라의 땅에 묻고 온 나오미와 같았다. 아무런 죄와 이유없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과도 비슷했다. 또한 무죄하나 감옥에 갖혔던 다니엘, 예레미야, 바울, 세례요한과 같았다. 그러자 중요한 것은 예수의 영이 그 속에 있었다. 사람은 그를 쫓아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와 묵묵히 함께 계셨다.
이후 그는 한 연상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도 인생의 차디찬 서리를 맞아본 인생을 경험한 여인이었다. 그는 결혼했고, 쌍둥이 딸들을 얻어 미국에서 받은 상처에 위로를 받게된다. 어머니가 죽은 후에 아내 리브가를 얻어 위로를 받았던 이삭처럼, 긴 20년동안 얻지 못했다가 얻은 쌍둥이(에서와 야곱)를 얻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통해 위로를 받으며 다시 일어났다.
몽골에서의 교회 생활은 앞에 나서서 하는 일은 하지 않고, 조용히 뒤에서 숨어서 하는 일을 했다. 친구가 목회하는 몽골 최대의 아미드 욱 교회(1,300-1,500명)의 지도자들 그룹인 운영 위원으로 봉사했다.
아내는 몽골 현직 국회의원(Congress women)이 되었다.
아내는 지난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76인 국회 의원중 한 명이 되었다. 아내가 교육부에서 일할 때, 경쟁자들에 의해 한바탕 마음의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당했다. 오직 기도로 위기를 넘겼다. 선거전에서 경쟁자 상대방의 공격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며 눈물로 기도했고 선교사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국회에 입성해서 정치인이 되었다.
본인은 몽골의 많은 지하자원이 묻혀있는 으문고비도의 어유톨고이라는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런후에 몽골 외무부의 공공 정책 부서의 부 대표로 일해 왔고, 아내는 교육부의 한 부서에서 책임자의 일을 했다. 아내의 남동생은 몽골에 뜨는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30대에 고난의 언덕을 넘고 넘었고, 30대 중반이 되자 하나님께서 아내를 통해 위로로 세워 주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모국에서 일으키심을 받았다.
몽골에서 다시 일어나는 신분 상승
그는 미국에서 추방당한 후 10년 이상 미국 입국이 거절되었다. 20대-30대 초반을 미국의 생활을 통해 많은 추억이 그곳에 있었지만 다시는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그 증거로 그의 여권에는 Black Stamp(검은 도장)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국가 공무원으로 일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국가대 국가의 공적 업무와 몽골-미국의 인맥이 형성되었다. 그는 한 몽골 주재 미국 대사관의 고급 공무원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미국 공무원은 자기 나라에서 추방된 사실을 듣고 긍휼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적극적으로 미국 시민권자로 몽골 외무부 공무원의 미국에서의 추방 사건을 미국 본토에 있는 외무부 상관들에게 변호하고 여권의 블랙 스탬프의 문제 해결을 주선해 주었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는 자기나라 본토에 있는 와싱톤에 전화하여 상급자와 설전을 벌여가면서 한 몽골인 공무원의 안타까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국가 안전에 대한 법적이인 문제로 인해 해결은 어렵지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Black Stamp는 수정되거 미국 입국을 허락받게 되었다. 이 모든 배후에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셨다!
다시 찾은 아메리카!!
그렇게 해서 2019년 미국 LA에 다시 왔다.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사랑하는 두 쌍둥이 딸들과 함께 왔는데, 마침 선교사가 박사 학위 문제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자신이 교회 개척에 동참했던 Denver 몽골 교회를 방문해서 동고 동락했던 교회의 형제 자매들과 만났고, 공부했던 대학원에도 찾아가 교수도 학교 관계자도 만났다. 장차 일할 Sanfransisco에도 갔다.
다시 찾고 아메리카에서 만나고 싶은 선교사
그는 다음 주에 몽골에서 Sanfransisco의 총영사로 신분 상승과 함께 회복의 옷을 입고 미국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젊은 날을 생각하니 선교사가 머리에 떠 올랐다. 그래서 안하던 전화를 하고 또 하고 또 해서 결국에는 세 번만에 통화를 했다.
미국에 오는데, 제일 먼저 선교사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선교사는 계획에 없던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다.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Covid 때문에 400번이나 여행하던 선교여행이 멈추었다. 다시 선교의 한 결과물이 되어버린 총영사의 취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하해 주고, 축복기도해 주기 위해 다시 이상한 비행기 여행을 해야 할 것 같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죽은 자 같은 사람을 살려내어 찬송 시를 지은 한나처럼, 룻처럼, 나오미처럼, 삼손처럼, 목동 다윗처럼 기적을 만든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기적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다. 놀람을 주시는 하나님, 양들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격한다!